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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딸 / 조지핀 테이

Double smile 2024. 11. 24. 01:42

 

시간의 딸 The Daughter of Time (1951년작)

조지핀 테이Josephine Tey 저/권도희 역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28일

 

영국 추리작가 협회에서 뽑은 최고의 범죄소설 1위 (1990년 간행)

the Crime Writers' Association (CWA)

The Top 100 Crime Novels of All Time(1990)

 

미국 추리작가 협회 the Mystery Writers of America (MWA)에서 선정한

최고 미스터리 소설 The Top 100 Mystery Novels of All Time. 4위.

(참고로 여기서 1위는 The Complete Sherlock Holmes)

 

시간의 딸 the daughter of time이라는 제목은 영국의 오래된 속담에서 나왔다. "Truth is the daughter of time". 이 말은 여러 사람들이 인용했다고 한다. 귀납법을 창시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도 비슷하게 이야기 했다. "Truth is the daughter of time, not of authority."

 

나는 이 말이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권위에 의해서 거짓이 진실인 것 처럼 왜곡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밝혀진다는 뜻이라고 보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르게 말했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점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자주 반복되는 기록은 결국 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역사적 사실, 즉 진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뜻이 반대다. 

 

한 해석으로는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 또 한 해석으로는 진실이라는 것이 사실은 시간이 만들어낸 거짓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 거짓을 거부하고 폭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다. 거짓말은 절대 그냥 지나치면 안된다. 어제 무시했거나 처리했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거짓말일지라도. 왜냐하면 거짓말쟁이의 한 가지 특징은 계속 재발한다는 것.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완전히 전설이 되어버린다. p169.

 

 

『시간의 딸』은 당대 애거사 크리스티와 도러시 세이어스에 맞먹는 인기를 누린 조지핀 테이의 최고 대표작이다. 탐정과 트릭 위주의 당시 주류 미스터리에서 과감히 탈피하며 미스터리의 새 길을 연 작품으로, 병원 침대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주인공 앨런 그랜트 경위가 기록에 남아 있는 증거만을 활용해 사백 년 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 이런 점 때문에 영국 추리작가 협회에서 뽑은 최고의 범죄소설 1위에 오른 것 같다. 

 

 

■ 플롯

 

런던 경시청Scotland Yard 경감 앨런 그랜트는 수사중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누워있다. 그의 친구인 여배우 마르타 핼러드는 그에게 역사적 미스터리를 조사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녀는 그랜트가 사람의 얼굴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사진을 몇 장 가져다준다. 그랜트는 그중 리처드 3세의 초상화에 흥미를 느낀다. 그는 외모에서 사람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음흉한 악인이라고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리처드3세가 반대로 온화하고 친절하며 현명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묻는다. 왜 모두 리처드3세가 잔인한 살인자라고 그렇게 확신할까?

 

그랜트는 다른 친구와 지인의 도움을 받아 리처드3세의 삶을 조사하고, 그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에 그의 이론을 테스트한다. 그랜트는 대영박물관에서 일하는 호감 가는 젊은 미국인 연구원 브렌트 캐러딘의 도움을 받아 몇 주 동안 역사적 정보와 문서를 숙고한다. 이 조사에 의하면 리처드3세가 즉위 시 영국 국민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자신의 정적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했다고 한다. 특히 어린 왕세자들의 어머니와 누나를 수도원에서 풀어주고 연금을 제공했으며 왕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게도 해주었다. 왕세자들의 어머니였던 전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도 리처드3세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리처드3세는 왕세자 형제들의 살인자가 될 수 없다. 그랜트는 오히려 리처드3세를 보스워즈 전투에서 죽인 헨리 튜더/헨리7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튜더왕조의 창시자 헨리7세가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리처드3세에 덮어씌워서 자신의 왕위와 튜더왕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 그랜트와  캐러딘의 결론. 

 

 

■ 1483년 리처드3세의 즉위 과정

 

글로스터공작 리처드는 원래 왕세자 에드워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기로 에드워드 4세가 결정

 

1483년 (조선 성종 14년)

4.09 에드워드 4세 죽음.

스코틀랜드와의 변경에 있던 글로스터공작 리처드는 요크에서 북부지방 귀족들 소집.

에드워드5세에 충성 맹세. 에드워드4세 추모 미사에 참여

 

4.24 우드빌가 리버스 백작 무장한 군사 2000명과 왕세자를 데리고 런던으로 이동. 

 

4.29 리처드는 북부지역 신사계급 600명과 런던행. 측근인 버킹엄공작과 300병사는 노샘프턴셔 도착

리버스백작과 왕세자는 이미 스토니스트랫퍼드까지 이동

리처드가 리버스 백작과 조력자를 체포하여 압송

 

5.04 리처드 공작이 왕세자를 데리고 런던 도착

왕세자 에드워드의 어머니 왕비 우드빌, 공주들,  우드빌가 도싯후작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감금. 

왕세자 에드워드는 세인트폴 대성당 주교 관저에 

 

6.05 리처드 공작, 부인과 런던의 크로즈비 플레이스로 거처 이전

 

6.08 자문회의에서 바스의 주교 스틸링턴이 선왕이었던 에드워드4세가 왕비 우드빌 이전 슈루즈베리 백작의 장녀인 엘리너 버틀러와 결혼했다고 증언. 왕비 우드빌과의 결혼은 중혼이 되어버리는 문제 발생. 

 

6.09 에드워드4세의 중혼문제 의회 상정.

 

6.10 리처드 공작, 요크에 자기 보호를 위한 군대 파병 오청

 

6.11 리처드 공작, 네빌경에게도 군대 파견 요청

 

6.16 리처드 공작, 어린 왕 에드워드5세와 동생 리처드를 런던탑에 유폐

 

6.21 런던탑에서 에드워드5세와 측근들 회합. 

리처드 공작, 회합을 중단시키고 헤이스팅스경 참수. 일리의 주교 존 모턴 체포하여 구금.

스탠리경 구금(후일 사면되어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 마거릿 보퍼트는 첫 남편 에드먼드 튜더와의 사이에서 헨리 튜더 출생한 랭커스터가 방계 여인)

 

6.26 의회 티툴루스 레기우스법 선포. 

에드워드4세의 중혼을 인정하여  우드빌과의 사이에 태어난 에드워드5세가 사생아 지위로 격하되고, 

글로스터공작 리처드가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

 

7.06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리처드 3세로 즉위. 

 

 

 리처드3세 Richard III(재위 1483~1485)

 

에드워드 4세의 막내 동생으로,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글로스터 공작이 된다. 이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집안에서 기사훈련을 받고 17세에는 군사지휘관이 되었는데, 에드워드 4세가 쫓겨났다 다시 왕위를 되찾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죽음 전에 리처드를 단독 섭정으로 임명하였을 정도로 리처드를 총애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4세가 죽자 당시 12세였던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를 대신해 섭정으로 잉글랜드를 다스리게 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치르기 직전에, 에드워드 5세의 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은 중혼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의회에서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에드워드 5세와 그 형제는 서자로 인지되어 왕위계승권이 낮춰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던 리처드 3세가 약 2달 후인 6월 경에 왕위에 오른다. 이듬해인 1484년 의회를 열어 여러 법을 통과시키며 <Titulus Regius /왕의 권리> 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이를통해  에드워드 4세의 혼인 문제를 근거로 자신의 계승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정리했다. 두 조카(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는  1483년 8월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후일 리처드 3세가 런던탑에 가두어 살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에서도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계유정난이 1453년 일어났다는 것. 영월로 귀양간 단종은 1457년 사망. 조선에서 8000Km 정도 떨어진 당시의 영국에서 비슷한 시기,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신기하다. 하지만 영국에서 리처드3세의 운명은 세조와 달랐다. 

장미 전쟁 중이던 1485년 헨리 튜더와의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플렌테저넷 왕조 및 그 방계였던 요크 왕가 최후의 왕이자, 전투에서 죽은 마지막 잉글랜드의 국왕이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죽은 해럴드 2세를 이어 잉글랜드 내 전투에서 죽은 두 왕 중 한 명이다. 

튜더 시대를 거치면서 리처드 3세는 곱추에 한쪽 팔이 기형이며 권세욕이 강하고 음모와 책략에 뛰어난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리처드 3세가 가진 폭군의 이미지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 존재하고 있다. 2012년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굴됨에 따라 최소한 그의 외모에 대한 것은 옳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리처드 3세는 척추측만증이 있긴 했으나 옷을 갖춰 입으면 크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으며, 키 172cm 정도에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을 것이라 한다. 2015년 3월 26일에는 리처드 3세의 시신이 레스터에 위치한 레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리처드3세의 유골

 

리처드3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소개한 좋은 기사  https://www.mk.co.kr/news/culture/1075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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